2023.09.06. 기고글
가끔 심심함을 못 참고 세상에 말을 건다. 하지만 세상은 마치 일베가 들어있을 지 구교환이 들어있을 지 모르는 초콜릿 상자같은 존재다. 나는 그 날 익명 커뮤니티에 오늘 저녁에 같이 술 마시고 책 보고 춤 추면서 놀 친구 한 명을 구한다고 말했다. 세상에서는 생각보다 빠른 답이 왔고 그 중 한명은 나한테 개인 쪽지를 보냈다. 자기 역시 심심한 사람이고, 나와 함께 책 읽고 술 마시고 춤 추고 싶다면서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호의를 보였다. 내가 그 글을 올린 게 아침 11시였고 그 쪽지의 답장은 열두 시 쯤에 왔는데, 저녁 때 까지 그 사람을 만날지 말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여섯 시 쯤에 연락이 왔다. 자기는 ㅇ자(여자 혹은 남자 둘 중 하나)이고, 오늘 만나지 않는다면 다음에라도 언제든 연락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낮은 텐션의 답장을 받고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긍정적인 답장을 하고 어디서 볼까 생각하던 중에 맛있는 비건 식당이 있는 곳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태원에서 보기로 했다. 이태원까지 가는 길에 난 내가 바람기가 있는 사람인가, 심심하다면 그냥 집앞 코노 가면 되지 왜 이렇게 세상에 쓸데없는 관심을 보여 리스크를 감당하려 드는지 하면서 스스로 쿠사리를 줬다. 그러면서 이따 만나게 될 사람이 나랑 잘 안 통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 나와야지 하고 생각했다. 지하철에 앉았는데 걱정이 좀 앞섰는지 왠지 시간이 안 가서 가는 길에 마마마를 1.5배속으로 봤다. 사야카가 변신을 하니까 이태원에 도착해있었다. 그 날 내가 저녁까지 만날지 말지 했던 고민은 사실 저녁에 뭘 입을 지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너랑 섹스를 하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티내지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별 이유는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색에 약간 더운 옷을 입고 입술에도 갖고있는 제일 진한 색을 바르고 나갔다. 이태원역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n번출구 앞에 있을게요라고 쪽지를 보내고 n+1번 출구 앞에서 기다렸다. 그 날 무슨 축제같은 게 있었는지 사람들이 저마다 엄청 화려한 옷을 입고 저마다 품은 이태원에 대한 에너지를 쏟아내려 나가고 있었다. 할로윈이 아직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미 귀신 옷을 입고 있었다. 이태원 말고 다른 데에서 보자고 할 걸 그랬다. 사람이 너무 너무 많아서 난 누가 어디로 나가고 들어가는 지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서로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는 이상 서로를 확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n번 출구 앞에서 툭 멈추는 어떤 사람을 봤다. 처음 본 순간 나는 그 분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같이 저녁을 보내고 싶지 않단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저녁은 고사하고 이태원 역까지 같이 올라가는 도중에 사람이 많아 저 사람이 내 옆에 들러붙기라도 한다면 토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고민하다가 그 사람에게 보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정말 멀리 왔는데 술이라도 한 잔 사달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 보지 못하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라는 미리보기를 보고 나는 인연을 뒤로했다. 그렇게 나는 이태원 역 밖으로 나왔다. 그 근처는 인파가 점점 많아져서 어디서 술을 먹거나 책을 볼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환승이 될 지 안될 지 모르는 버스를 타고 (환승은 안됐다..) 녹사평 쪽에 재즈 클럽으로향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버스에 타서 아까 뒤로 한 사람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파티가 있는 날이니까 그 사람도 재밌게 놀다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아파트 단지 앞에 잘못 내렸다. 역 근처는 그렇게 북적북적하고 밝았는데 버스 내린 곳은 조용히 개만 짖고 있었다. 멀리서 소음이 불꽃놀이 하듯이 작게 울렸다. 밝은 빛의 보호로부터, 내가 선택한 세상과 쾌락으로부터 살짝 멀리 떨어져서 나는 마주하지 못하는 것에 욕심내지 말잔 생각에 괜히 살짝 외로워지고 울적해졌다. 20분정도 걸어서 녹사평역에 도착했고 n번출구로 들어가는 계단부터 줄을 서서 아주 천천히 집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아주 늦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이태원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충격과 함께 그 사람이 생각났다. 거짓말까지 하고 회피한 상황에 다시 연락을 해도 되나 싶었다. 연락을 했고 그 사람에게 답장은 없었다. 아마 그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나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