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좀 더 어렸을 때에는, 우리가 생산을 위해 모든 것을 소모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시간의 지평안에서 미래를 상상할 때, 그것이 개인의 삶이든, 국가의 역사이든 간에 중요시 되었던 것 의지와 기술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잘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의 미래를 만들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 펼쳐진 시간들을 보십시오, 이 시간들은 우리 과거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까? 당신이 지금 하루를 보내는 시간의 전부는 당신의 원하거나 잘하는 것의 결과입니까? 아니 저는 오히려… 이 주변에서 벌어지고있는 모든 것들은요 내 희망과, 의지와, 기대, 차이와 특출남 따위와는 전혀 다른 매커니즘(맥락)으로 돌아간다는걸 이제 알아차리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루에 일을 하기위해 쏟는 시간은 당장의 물리적 조건들을 충족하고자 하는 생산자의 부여된 의지로서 반사적인 날갯짓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의지’라는게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날아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몸과 눈알들은 나의 정신 바깥에서 동작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미래, 아니 현재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꿈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세계의 시간을 지배하는 매커니즘은 기대-실현 이라는 인과가 전혀아니고 그것은 자기 전에 정말 꿈을 꾸듯이 (꿈꿈?) 현재를 보내기 위한 정신의 쓰레기 잔여를 처리하는 여과단계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생산성에 관한 작게 부숴지는 힘들의 조각들이 계속 흩여지면서 너를 불안하게 만드니까 너는 그 불안함에 기반한 생산 노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죽음은 생산세계의 바깥에서 잊혀져야 하는 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흩어지는 공간으로 비워집니다. 그 빈 지대에 다가서면 우리는 어려서 설계했던 희망세계의 진입에 뒤쳐질꺼라는 두려움과 또...또 불안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자, 디자이너로서 저의 클라이언트의 사사로운 이미지 생산의 욕망을 듣고 실현하는데 저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합니다. 욕망 실현 생산의 도구로서 디자인은 언제나 실패하고 쓰레기를 생산합니다. 저는 가끔 나의 클라이언트가 사死자라면 어떨까 상상합니다. 그는 무엇을 요구할까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어떤 이미지를 그릴까요? 아무 이미지도 그리지 않을겁니다. 그는 그를 통해 무엇을 기대할까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러한 요구를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망각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생산을 그만 둔 채로 다만 그들의 시간을 잠시 응시합니다. 내가 어릴 때 기대했던 꿈과 희망, 그건 커다란 인물이 되기 위한 욕망의 실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과장된 불안과 자기과시였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선생님의 강요에 의해 섣부르게 정의내려진 어색한 어른스러운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것 보다, 그들을 마주하고, 사람들이 지나쳐벼린 장소에서 조용한 응시로 떠나간 대화를 다시 기억하는게 과거로 부터 기대되었던 나의 시간을 가장 솔직하게 다시 마주하는 방식이 될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 글 속에서만 실현가능할 망상일까요?
텍스트 바깥에서 또 분절된 시간조각들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