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근무를 시작한 뒤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 덕에 지금처럼 일기도 적을 수 있다. 파주로 통근할 때는 업무 강도도 상당했고 야근도 잦았다. 언제였던가 기운을 끌어모아 주 2회 이상 아트시네마에 가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머지않아 원인 모를 염증 수치로 극장이고 뭐고 응급실에 실려 다니며 간신히 숨쉬며 지내곤 했다. 그러나 당시엔 괴로움을 상쇄하는 설렘과 열의로 가득했기에 잔병치레 정도야 번거로운 방해물 정도로 여겼다. 누가 괜찮은지 물으면 왠지 무심한 척을 하며 정말 힘들 때에 비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새기곤 했다. ​

그런데 이제 그 ‘정말 힘들 때’라 하는, 주말의 밤과 새벽에 이태원에서 서빙하던 그때는 이제 먼 과거가 되어 남의 이야기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종일 서서 일하는 한 주가 있었는데, 밤마다 다리가 붓고 저리는 동안 새삼 놀라워하고 그랬다. 잠자리에 누인 몸이 화끈거리고 녹아내리는 그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현재 나는 5년 째 사무직으로 종사 중이다) 이태원에서 일을 시작할 당시의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학년이 올라가며 철야 작업이 늘어 아르바이트의 가짓수를 줄여야 했고 생활비나 재료값으로 점점 많은 돈이 들었던 탓에 주말을 집중적으로 태우게 되었다. 한편으로 조금 더 거칠게 몸으로 부딪히고, 어설프게나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주점이자 문화 공간에서의 일에 끌리기도 했다. ​

그 주점에서 우린 피로를 곧잘 열의로 환원시켰고 이를 위한 방법론은 간단하게도 일요일 아침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혹은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생각하는 건 손바닥과 다리가 찢기는 고단함을 이고 지내게 되면 (앞서 비슷한 표현을 적었지만) 이를 상쇄하며 버틸 힘을 줄 설렘과 희망이 필요해진다. 어쩌면 이후 파주에서든 어디에서든 저마다의 환경엔 큰 차이가 있음에도, 조금이라도 지친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나를 둘러싼 사건과 환경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 상상하고, 그렇게 무언지도 모를 기대를 품는 습관은 그즈음부터 내 안에서 굳어진 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일요일 아침에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필코 술을 마시며 제각기 반드시 이뤄내고 싶은 무언가를, 늘상 비슷한 말을 마치 처음 말하는 듯 주절거렸다. 또한 그리 결연한 다짐까진 아니더라도 생기를 부여하고 서로를 긍정할 수 있는 행위를 틈틈이 붙들고자 애쓰기도 했다. 예컨대 출근 전에 할리스에 모여 책을 읽으며 헤밍웨이를 함께 아꼈고 가게 스피커로 나스 음반을 틀어두고 역시 이스트이니 웨스트이니 하며 손가락으로 E나 W를 들어 보인 채 떠들었고 90년대 나이키의 전설적인 모델을 논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사장님(이라기보단 동료에 가까웠던 듯하지만)이 내게 주다시피 팔았던 한 신발은 여전히 가장 아끼는 운동화이다. 그때 우린 너무 자주 술에 취해 너무 내밀한 구석을 공유했고 그런 과정에서 여러 관계와 감정이 뒤섞이고 전복되곤 했다. 그곳에선 경멸이 동료애가 되기도, 침묵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도, 정신적 불구로 만들 만큼 괴로움을 준 사람을 가슴 깊이 존경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건 취한 손님들의 난잡한 소음, 흡연실 뒤편에서 깨던 부탄가스, 마감 이후 홀의 정적을 가득 메우는 담배 연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좋지 않았던 날들도 있겠지만, 나를 비롯한 그곳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 장소를 분명한 자긍심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

팬데믹을 거치며 가게는 클럽인지 무언지로 변신을 시도하다 끝내 사라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수의 몇을 제외하곤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구태여 찾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오전 다섯 시에 함께 택시를 타고 스텝밀을 먹고 밤거리를 걷곤 했던 여사님의 행방은 이따금 궁금해지긴 한다. 그저 여사님이라 불렀을 뿐 이름조차 모르는 그 분의 연세는 적게 보아도 60대 후반에 이를 것이었다. 그 분께선 홍제동 언덕 위 주택가에서 혼자 사셨고 고정 휴무인 화요일마다 나들이를 가셨으며 주로 홍대와 이태원의 주점으로 파견을 다녔는데 이태원이 두 시간 더 늦게 끝나기에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말하며 말갛게 웃곤 하셨다. 그분은 파견직인 만큼 이태원 1번 출구 뒷거리에 활기가 돌 때에나 모실 수 있었는데, 어느 해의 할로윈 전후에는 온 일대에 사람과 열기가 넘쳐흐른 덕에 매주 그 분의 얼굴을 뵙기도 했다. 이후 나는 그분보다 먼저 일을 그만두었고 헬퍼를 나갈 때에나 만나서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여사님에 대한 기억이 유독 각별한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그분과 주방 앞에 나란히 서서 농담과 격려를 나누던 순간들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내 앞에서 그분의 어깨를 살갑게 주물러드리던 한 친구의 얼굴이 멈춘 이미지로 가슴에 박혀 언제까지나 존경하게 될 하나의 상으로 자리잡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

지금도 밤거리를 걷거나, 싱크대 앞에서 선 채로 식사를 해결하거나, 혹은 어떤 연관을 찾기 어려운 아무 때에 당시 주방 파견을 나오던 여사님의 행방을 궁금해한다. 이는 여사님의 소식을 접한다고 해소될 리 만무한 것이 그분의 부재는 한 시절의 장소에 따른 생에 대한 의욕, 어그러진 모양새로 얽혀 있던 공동체 의식을 그 중심부에 끌어안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과거가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려운 무언가가 되었다 한들 이 기억은 여느 존엄한 가르침과 같이 끊임없이 제 몸을 뒤틀고 꺾으며 정신적 혈관으로서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 여전히 가지를 드리울 것이다.

​ 더이상 힘들던 때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는 식으로 그때를 떠올리진 않게 된 만큼, 그러니까 마치 내가 겪었던 시간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렇게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빈번하게, 일말의 양심도 없이 그 장소를 내게 있어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때 일을 좀 덜 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야말로 부끄러운 생각이다. 그 장소는 하나의 주제로 구획될 수 없는 지금의 공부, 라는 행위를 미약하게, 그러나 결코 끊어지지 않을 하나의 선으로 그 중심을 꿰어주는 축이기 때문이다.